2026년 2월 23일, 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의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 취소소송에서 승소했다. 영국 법원의 중재판정 취소 인용률이 최근 2년간 3%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바늘구멍을 뚫은 결과다.
론스타 ISDS 4,000억 원에 이어 엘리엇 1,600억 원까지, 한국 정부는 총 5,600억 원의 국고 유출을 방어했다. 하지만 이번 승소가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사건은 중재절차로 환송되었고, 최종 결론까지는 수년이 더 걸릴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사건의 배경부터 승소의 핵심 논리, 아직 남은 쟁점, 그리고 이 판결이 갖는 의미까지 정리한다.
사건의 시작: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 사건의 출발점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그룹은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추진했다. 합병비율은 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0.35주.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불리한 비율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당시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던 엘리엇은 합병에 강력히 반대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회사 ISS도 반대 의견을 냈다. 외국인 투자자(지분 33.53%) 다수가 합병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합병 성사의 열쇠는 국민연금공단이 쥐고 있었다.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보유한 최대 단일주주였다. 2015년 7월 17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합병은 69.53%의 찬성률로 승인됐다.
이후 국정농단 수사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가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돕기 위해 국민연금에 찬성 투표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엘리엇의 ISDS 제기와 중재 판정
엘리엇은 2018년 7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근거하여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S를 제기했다. 청구 금액은 7억 7,000만 달러, 약 1조 원 규모였다.
엘리엇의 핵심 주장은 이랬다. 국민연금공단은 국가기관이고, 국가기관인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투표는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해당하며, 이로 인해 삼성물산 주가가 하락하여 자신들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2023년 6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엘리엇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한국 정부에 약 690억 원(5,358만 달러)과 지연이자를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엘리엇이 요구한 금액의 약 7%가 인용된 것이다. 이자를 포함하면 2026년 2월 기준 총 약 1,600억 원에 달한다.
한국 정부의 반격: 취소소송 3라운드
한국 정부는 판정에 불복하고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3차례의 법적 공방이 이어졌다.
1라운드 — 영국 1심 각하 (2024년 8월)
한국 정부는 한미 FTA 조항 해석 문제를 근거로 PCA의 관할권 자체를 다투었다. 그러나 영국 고등법원(High Court)은 이 문제가 영국 중재법상 취소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각하했다.
2라운드 — 항소심 승소 (2025년 7월)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항소했다. 영국 항소법원(Court of Appeal)은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사건을 다시 1심으로 환송했다. 1심 법원이 취소 사유를 심리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3라운드 — 파기환송심 승소 (2026년 2월 23일)
사건을 돌려받은 고등법원은 이번에 PCA 중재판정의 핵심 전제를 뒤집었다. “국민연금공단은 국가기관이 아니다”라는 한국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승소의 핵심 논리: 왜 ‘국민연금 ≠ 국가기관’인가
영국 법원이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은 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별개의 법인격이다. 국민연금공단은 정부와 분리된 독립적인 법인격을 보유하고 있다. 정부 조직 안에 있는 부처가 아니라 별도의 공공기관이라는 점이다.
둘째, 핵심 국가기능이 아님이다. 공적연금기금의 운용은 치안이나 국방처럼 국가의 핵심 기능(sovereign function)에 해당하지 않는다. 연금 운용은 국가 주권의 행사가 아니라 기금 관리 업무에 가깝다는 판단이다.
셋째, 의사결정의 독립성이다. 국민연금공단의 일상적인 의사결정이 정부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자 결정이나 의결권 행사는 자체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 논거로 영국 법원은 “국민연금의 투표 = 정부의 행위”라는 원 중재판정의 전제를 깨뜨렸고, 해당 부분을 취소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은 쟁점
그러나 이번 판결이 한국 정부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단서가 붙었기 때문이다.
영국 법원은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한 행위 자체는 한미 FTA상 ‘관련성 있는 조치(relevant measure)’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즉, 국민연금의 투표 자체는 정부 행위가 아니지만, 정부가 국민연금에 압력을 행사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건은 중재절차로 환송되었고, 환송 중재에서는 두 가지가 핵심 쟁점이 된다.
- 인과관계: 청와대·복지부의 개입 행위가 실제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영향을 미쳤는가?
- 손해 입증: 그 개입이 엘리엇의 구체적인 금전적 손해로 이어졌는가?
법무부 민경원 검사도 “국가기관의 행위와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사이의 인과관계, 그리고 그것이 엘리엇의 손해로 이어졌는지 여부가 핵심 방어 전략”이라고 밝혔다. 환송 중재 판정 이후에도 양측이 다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 최종 종결까지는 수년이 더 소요될 가능성이 있다.
이 판결이 갖는 세 가지 의미
1. 국민연금의 국제법적 지위 확립
“국민연금은 국가기관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영국 법원을 통해 국제법적으로 확인된 선례가 됐다. 이는 단순히 이번 사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향후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에서 국가기관으로 취급받아 각종 규제나 소송 리스크에 노출되는 상황을 방어하는 법적 기반이 된다.
법무부 조아라 국제투자분쟁과장은 “국민연금 기금이 보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2. ISDS 대응 시스템의 성과
론스타(4,000억 원)에 이어 엘리엇(1,600억 원)까지, 한국 정부는 연속으로 ISDS 취소소송에서 승소하며 총 5,600억 원의 국고 유출을 방어했다. 특히 엘리엇 소송비용의 6분의 1만으로 승소했다는 점은 효율적인 법률 대응의 사례로 기록된다.
3. 그러나 근본적 질문은 남는다
이번 승소가 “한국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와 복지부의 국민연금 압력 행사는 국내 형사재판에서 이미 유죄로 확정된 사실이다. 영국 법원도 정부의 개입 행위 자체는 인정했다.
논쟁의 핵심이 “국민연금이 국가기관인가”에서 “정부 개입과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가”로 이동한 것이지, 개입 사실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니다.
향후 타임라인
| 시점 | 내용 |
|---|---|
| 2026년 2월 23일 | 영국 법원 취소소송 승소 |
| 향후 수개월 내 | 취소 범위·소송비용 분담 등 세부 쟁점 정리 |
| 시기 미정 | 엘리엇 측 항소 가능성 |
| 시기 미정 | 환송 중재절차 재개 (인과관계·손해 재심리) |
| 별도 진행 중 | 메이슨 캐피탈 ISDS 취소소송 (약 800억 원 규모) |
정리
엘리엇 ISDS 승소의 핵심은 “국민연금은 국가기관이 아니다”라는 한 문장이다. 이 판단이 1,600억 원의 배상 책임을 뒤집었고, 국민연금의 국제법적 독립성을 확인하는 선례가 됐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중간 승리에 가깝다. 정부의 국민연금 개입 행위 자체는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 있고, 환송 중재에서 인과관계와 손해 입증을 둘러싼 공방이 다시 시작된다. 론스타 ISDS가 13년 걸렸던 것처럼, 엘리엇 사건의 완전한 종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